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문단 편집) == 후손 이야기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후, 안토니우스 가문은 마르쿠스라는 이름을 한동안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법안 때문이었다. 이 법안을 제정한 사람은 [[키케로]]의 아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30년 집정관)|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였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이를 통해 하늘은 키케로의 집안이 안토니우스에게 최후의 벌을 내리도록 하였다."라고 평하였다. 재미있게도 안토니우스 가문은 옥타비아누스가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 다음에도 멸문당하지 않았다. 대가 끊긴 건 키케로 일가였고, 키케로 일가 소멸한 뒤 안토니우스의 증손자 혹은 고손자부터 안토니우스 직계는 마르쿠스를 합법적으로 사용했다. 더 재미있게 된 것은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은 후손들이 아우구스투스, 아그리파 등 내전 승리 세력들의 비호 아래 옥타비아누스의 직계후손들이 되어, [[네로]]가 자살할 때까지 로마 제국을 지배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우스가 내전기 당시 아나톨리아 여기저기에 심어 놓은 클리엔테스 후손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의 예처럼 200년 뒤부터 로마 심장부인 원로원에 진출해 3세기부터 안토니우스 가문의 이름을 달고 제위까지 차지했다. 안토니우스의 어머니인 율리아는 카이사르의 친가 팔촌이었고, 안토니우스 본인도 카이사르파의 중요한 구심점 중 하나였다. 때문에 카이사르의 양자지명이 있었을 뿐 카이사르와의 혈연관계가 강한 것도 아니고, 출신 본가와 입양된 율리우스 가문 모두 로마를 쥐락펴락하는 명문대가 출신도 아니었던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내전 승리 후에도 안토니우스와 유가족들을 무시할 처지가 못 됐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누나 소 옥타비아이고,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와의 결혼 전 얻은 아들 중 율루스가 옥타비아의 입양아들로 일찍이 옥타비아 손에서 친아들처럼 자랐던 터라 마냥 안토니우스 자녀들을 내칠 상황도 못 되었다. 더 재밌는 것은 옥타비아누스로 불린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내가, 계산적이고 냉정한 이미지와 달리 본인과 누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피가 흐른 아이들에게 무척 따뜻하고 그들을 친혈육으로 여겼던 부분일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어릴적 시골에서 자라 여느 로마귀족들과 다르게 핏줄에 대한 집착, 입양으로 맺어진 양자와 누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지나쳤기 때문인데 이는 안토니우스 자녀들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실제 주인공이 되고 카이사르 가문 사람들로 불린 이유가 됐다. 물론, 안토니우스가 사후에도 그 영향력이 무시할 처지가 안 되어 정치적으로도 유용한 이유도 있다. 어쨌든 옥타비아누스로 불린 시절,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내팽개친 소 옥타비아와 그녀의 두 딸, 풀비아와의 사이에서 얻어 옥타비아가 양자로 삼은 안토니우스의 아들 율루스를 거둬들여 본인의 친혈육과 두 양자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주고 보호해줬다. 물론 계산적이고 냉정한 이미지와는 달리 가족들에게는 나름대로 따뜻했던 아우구스투스 본인에게는 고아가 된 안토니우스의 자녀들을 거둬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풀비아 태생의 장남 안틸루스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내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살해당했지만, 풀비아 태생의 아들 중 옥타비아가 거둬 양자로 삼은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태생의 두 안토니아(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는 황족의 일원이 됐다.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해, 아우구스투스의 도움 아래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율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와 불륜을 벌여, 아우구스투스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그 불륜이라는 것은 남녀 사이의 바람이 아닌, 율리아가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즉위하길 기다리면서, 정치에 적극 개입하려고 한 시도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진노를 산 일이었다. 이때 율리아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해, 자신을 도와주고 내 편에 서준다면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는 일종의 스폰서 제안을 했다. 이렇게 되자 율리아와 남녀 사이의 불륜 관계를 맺던 전직 법무관 출신 원로원 의원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일설에는 그라쿠스 형제 중 고결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클라우디아 부부의 세 아들이 요절했다는 식으로 소개됐는데, 이 사람은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의 후손으로 강하게 추정된 인물이다. 상당한 미남으로 율리아와는 아그리파 생전부터 연인 사이였다고 하며, 티베리우스가 충격을 받고 로도스 섬으로 가출한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 따라서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아우구스투스는 크게 화를 내면서, 티베리우스에게 용서를 구하고 율리아를 직접 간통죄로 고발하게 된다.] 등은 추방형 정도에 그쳤음에도, 남녀 사이의 육체적 불륜은 하지 않은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홀로 반역재판까지 회부돼 유죄 선고 후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 볼 때, 문자 그대로 배신이었기 때문에, 당사자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본인의 잘못과 양어머니이자 장모 옥타비아의 명예를 실추시킴을 유서에 적고 자살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자신의 조카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그 자녀들을 용서하고 이때부터 이들을 보호해준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자신이 한때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 아들을 거뒀더니 배신을 했다는 식으로 말하긴 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본인 측근, 원로원 안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여전히 이를 갈고 있던 사람들이 연좌제로 안토니우스 가문의 씨를 말리라고 함에도, 듣는 시늉만 하고 그대로 무시했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외손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 율루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손녀 율라 안토니아의 재산을 뺏지도, 목숨을 거두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당시 살아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혹시 모를 궁중 음모에서 떨어트릴 목적으로 오늘날의 프랑스 [[마르세유]]인 그리스 식민도시 마실리아로 유학보내고 율라 안토니아에 대한 공식 의견을 밝히지 않고 처분에 대해 언급도 못 내게 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결혼해 잘 살고 있던 율라 안토니아를 배려해, 그녀에 대한 공격을 입도 못 떼게 했다. 이어 안토니우스 가문을 잇게 된 루키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나이가 어려 추방형에 처해야 하나, 본인 잘못도 없고 아이의 미래도 중요하니 유학보내는 것으로 참작하겠다"고 밝히면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안토니우스 가문을 이었음에도 자신의 본가 옥타비우스 가문에도 이중으로 속하고 이를 잇고 있다는 식으로 사면의 명분까지 만들어줬다. 이는 복귀한 티베리우스 역시 비슷했는데, 전처 율리아에게 분노와 딱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던 이상으로 율루스 안토니우스 숙청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티베리우스 역시 그와 그 일가를 보호해줬다. 그래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아내와 마실리아로 건너가 로마법, 수사학을 공부해 학자로 살다가 죽었다. 이후 이야기에 대해 [[타키투스]]는, 서기 25년 안토니우스의 손자 루키우스가 향년 45세에 죽었을 때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소 옥타비아의 손자이고 황족이므로 로마에서 묻혀야 된다며 그 시신을 아우구스투스 본가인 옥타비우스 가문 묘지에 묻힐 수 있게 배려해줬다고 한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뒀는데, 이 사람의 아들, 손자, 증손자 모두 갈리아에서 태어났다가 이탈리아로 귀국해 살았다고 한다. 이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안토니우스의 증손자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도와 [[플라비우스 왕조]]가 창건되는데 힘을 보탠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과거 안토니우스에게 시민권을 받은 갈리아인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인물로도 유명한데,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아들 혹은 손자로, 티베리우스가 키케로 일가의 요구로 아우구스투스가 통과시켜준 "안토니우스 가문은 앞으로 남자 아이 이름으로 마르쿠스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조치를 무효화하면서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제대로 물려받은 안토니우스 가문의 직계 남성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젊을 적부터 자신의 조상 안토니우스를 쏙 빼닮기로 유명했다. 그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일가가 갈리아에서 생활할 당시 [[툴루즈]]에서 태어났다가 로마로 건너왔다고 한다. 그런데 등장 당시부터 직계 조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후손답게 일찍부터 안토니우스를 쏙 빼닮아 체격이 당당하고, 용장으로 유명했다. 그는 네로 시대때 원로원 의원으로 있다가, 발레리우스 파비아누스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누명을 쓰고 추방됐다가 [[갈바]] 즉위 후 복직했다고 한다. 따라서 방계 황족임에도 이후부터는 네로에게 등을 돌렸는데, 장군으로 활동했던 시절부터 용장이면서도 심리전과 협상에 능했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 [[타키투스]]는 그를 "행동에 있어서는 용감하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을 심사장에 끌어들이는데 영리하며, 내란과 반란의 시기에 강력하고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워, 평화기에는 나쁜 시민이 되고 전시에는 멸시받을 수 없는 휼륭한 위인이 된다"고 평했다. 이는 안토니우스가 살아생전 들은 평가와 상당히 유사한 평가인데, 어쨌든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이런 능력을 선보이며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혼란에 빠진 로마시 치안을 정리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입성하기 전 평화를 가져왔고, [[도미티아누스]] 시대까지 살았다. 안토니우스가 소 옥타비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안토니아 자매는 모두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자매는 이름이 율리아 안토니아로 똑같아, 첫째는 대 안토니아, 둘째는 [[소 안토니아]]로 불린다. 대 안토니아는 기원전 22년 명문 귀족 가문의 자제이자 장군이며 전차 기수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젊은 귀족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혼인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얻었는데, 딸 도미티아는 결혼하기 전에 요절했고 장남 루키우스 역시 결혼 전 요절해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1남 2녀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헌데 안토니우스의 외손자가 되는 대 안토니아의 두 아들 루키우스, 그나이우스는 막장들이 많은 로마 귀족 상류층 내에서도 최악 수준의 망나니로 유명해, 부모와 안토니우스 이름에 먹칠했다. 이중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외사촌형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는 아들을 한명 뒀는데, 그가 바로 [[네로]] 황제이다. [[소 안토니아]]는 상당한 미녀였음에도 안토니우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답게 상당한 여장부로 유명했다. 그녀는 아주 어릴적부터 정숙하고 교양이 풍부하면서도 용감해,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그녀를 무척 아꼈다. 그래서 리비아 드루실라는 남편 아우구스투스를 매일 설득해, 자신이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차남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와 그녀를 일찍이 약혼시킨 뒤 결혼시켰다. 소 안토니아는 다른 또래 로마 귀부인들과 달리 공화정 초기의 전통적인 로마, 이탈리아 어머니 같은 성격을 갖고 있어, 남편 드루수스를 따라 험지에서 아이를 낳고 직접 젖을 물리고 훈육을 담당해 큰 존경을 받았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드루수스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뒀는데, 이중 3명은 성인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일찍부터 아우구스투스 부부와 원로원, 민중들에게 카이사르 사람들로 불리며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직계혈육으로 공인됐다. 소 안토니아의 장남 [[게르마니쿠스]], 장녀 [[리빌라]], 차남 [[클라우디우스 1세|클라우디우스]]가 그들인데, 3대 황제 [[칼리굴라]]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므로 네로까지 포함하면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은 세 사람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법적 손자, 증손자, 고손자로 제위에 오른 기염을 토했다. 클레오파트라 태생의 두 아들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다 살해당한 [[유바 1세]]의 아들인 [[유바 2세]]와 결혼하여 마우레타니아의 왕비가 되었다. 셀레네는 유바와의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마우레타니아)|프톨레마이오스]]를 뒀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자기 인맥을 이용해 로마 제국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로마 제국을 자극한다.[* 마우레타니아 왕국에게 유리한 결정을 얻기 위해 벌인 내정 개입이 아니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황제, 황실, 황제파 인사 및 [[프라이토리아니]] 모두 가장 민감하게 여긴 부분과 원로원의 의사결정 자체를 가지고 조종하려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를 갈고 있던 칼리굴라 황제과 원로원은 사이가 껄끄러웠음에도 공동작전을 세운다. 그 결과, 서기 40년 황제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이용해 로마를 방문한 프톨레마이오스를 암살하고, 원로원은 황제에게 암살 성공 소식을 듣자마자 마우레타니아 왕국을 둘로 쪼개 로마 속주로 편입시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